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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식장 가는 건 아니고오... 걍, 해보면은 재밌잖아."

 

했던 설명을 다시 했다.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성이 급하지 못한 그의 성격에 말을 몇 번 번복한다고 짜증이 날 건 없었다. 더군다나 이 메이크업 샵의 종업원들은 전부 바빴고, 그들에게 식장에 향하지 않을 화장, 사소한 흥미로 그 흉내나 내는 화장이 맡겨지는 것도 유별날 것임에 분명했다. 그저 자주 할 장난이 아니기에 최선을 다 하고 싶었고, 전문가의 손을 빌려 꾸민 얼굴에 정장을 입어 보고 싶었다. 그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 씻고 온 것은 물론이다.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은 머리칼, 뜨뜻한 뺨과 목덜미에서는 비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장난 예복이라. 결혼이라고 해 봐야 지희에게 떠오르는 건 주변 사람들이 건냈던 수다에 담긴 그림 뿐이었다. 동화책의 결말을 장식하는 해피엔딩, 관계의 종착지, 영원히 이 사람과 함께하리라는 주문. 이런 놀이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그 주문이 갖는 매력 때문이겠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든 없든 그 주문 자체에는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빛을 받는 기둥들, 그 사이에서 어떤 때보다도 두드러지는 자신, 그리고 이 주문에 함께할 사람. 백일몽이 여기에 닿자 적색 눈빛과 묘하리만치 창백한 손이 떠올랐다. 샤오도 여기에 있었다면 또 다른 느낌이었겠지만 지금은 나 뿐. 이 장난이 철저하게 개인적일 것을 상기하니 아쉬움과 함께 묘한 흥미가 일었다.

 

"이리 와요. 턱시도를 입는다 해도 화장은 해야지. 여기 앉고... 고개 너무 젖히지 말고. 그렇게. 좋습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에 이끌려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이내 분주히 피부를 닦아내고 베이스 화장을 한다. 크림을 몇 번 발라야 하고, 어떤 에센스를 어디에 써야 하는 이야기를 듣자 특유의 히죽거림으로 무어라 답하지만, 자기 얼굴을 매만지는 이와 눈이 마주치는 건 영 쑥스러웠다. 평소 이렇게 외양에 신경써 본 적이 아예 없는데--애초에 몇 층이나 크림을 발라 줘야 할 정도로 내가 중요해도 되는 건가. 멀쩡하게 돈을 냈음에도 남의 도움을 받으면 으레 그렇듯 잘못하는 느낌이 들어 눈을 슬쩍 감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때 그가 보이는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상대나 나나 더 편하게 할 거라 믿는 시선 차단.

 

사실, 남보다는 지희 자신에게 제일 편한 상태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은 지 몇 분 되지 않아 졸기 시작했다.

 

"...꾸벅거리시면 안 됩니다..."

 

웃음기 섞인 난처한 목소리에 깨고 말았다. 아티스트만 민망한 상황인지, 지희 본인은 익숙하다는 듯 거울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에 가까운 그의 피부에 맞게 화장한 얼굴은 새하얘졌다기보단 부드럽고 매끄러워진 빛깔이었다. 다만 눈 아래의 다크서클은 화장이 무색하도록 거뭇하게 남았다.

 

"기미가 짙으신 편이라 화장을 많이 두껍게 하지 않으면 지우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이대로 괜찮으신가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실거린다.

 

"거야 뭐어... 눈 밑 안 까맸던 때는 기억도 안 나아. 화장이니까 기왕 더 짙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어, 거어 쫌 어울릴 지도 모르겠는데에."

 

아티스트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눈화장만 좀 할게요, 하면서 박하사탕 몇 개가 담긴 그릇을 가리켰다. 나긋이 고맙다고 말하고는 하나 가져갔다. 보통 사람들이 간식 먹으라고 할 때는 반 이상은 끝냈을 때 그러더라. 그렇게 생각하며 차갑고 꾸덕한 붓 끝이 눈매를 다듬는 동안 기다렸다.

 

화장이 끝났을 때 자기 눈에 비친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자신의 말마따나 칠이 더해진 눈가는 억지로 되살아나지 않고 되려 그 거뭇한 빛이 얼굴에 녹아들었다. 신기함에 지어 보인 미소마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아 입가를 살짝 건드렸다.

 

"마음에 들어요?"

 

아티스트가 밝게 말했다. 지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생 엄청 했겠네에. 이제 정장 입어보면 또 깜짝 하겠는데에."

 

놀라게 한 것은 정장의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셔츠는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바지와 자켓도 마찬가지였다. 윤기 나는 안감은 흐르는 물을 옷감으로 만든 것 같았다. 허벅지를 감싸는 매끄러움, 팔을 안아 오는 은근한 무게는 한눈에도 옷의 가격을 짐작케 했다. 비싼 옷은 섬세한 손길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서늘한 감촉이 피부에 감겼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매어 준 넥타이가 얹힌 목덜미 역시 옥죄이는 느낌이 아니었다. 도리어 피부에 녹아드는 감각이 풀릴세라 넥타이 매듭을 건드리는 것조차 피했다.

 

사람이 정장에 부여하는 의미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지희는 실감했다. 지금 모습이 자신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모습에 가까운 모습을 찾으려면 차라리 자기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을 떠올려야 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그때 막 프리랜서 기자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억척스러움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문제될 리 없다는 그 고집스러운 미소는 신부복과 함께 밝게 빛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꽃잎이 겹겹이 싸인 모란꽃 같았다. 그 옆에서 지금 지희의 옷처럼 검은 턱시도를 입었던 아버지는 신랑이라기보단 차라리 모범생처럼 보였다. 아버지 특유의 느긋한 낙관주의는 연기나 냉소를 배제했고,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그의 웃음에는 지나친 날카로움이나 강렬함이 담기지 않았다. 

 

그 웃음을 생각하며 지희는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화장 때문에 평소와 달라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그 본연의 표정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 때 결혼식 사진을 찍던 순간의 부모님과 자신이 대면한다면 자기 역시 축복의 순간에 하나의 부속물로서 섞여 들어가겠지만, 어머니처럼 빛나거나 아버지처럼 섬세한 표정을 짓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만날 일 없는 그 순간의 부모님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쩌면 자신이 동경하는 그 차이점이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화장과 잘 어울리는데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감탄했다. "사진 몇 장 찍겠습니다."

 

여전히 웃음이 지워지지 않은 채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옷감을 한 번 쓸어 보고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장난이라고 해서 조금은 진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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